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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단직원의 경영일기

지록위마

한 작은 인터넷 방송국에서 요청이 왔다. 개국을 앞두고 있으니 사장님의 축하 영상메시지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요청이 들어오면 다른 회사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는게 순서이다. 소위 급이 맞는지를 재보는 것이다. 알아보니 흔히 말하는 주요 회사들이 참여한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작은 우리회사는 굳이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애써서 남의 회사 자리에 들러리 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런 의견을 부장님에게 전달했다. 부장님은 내 의견에 동감하면서도 혹시 또 모르니 사장님께 보고는 해야할 것 같다고 했다. 당시에는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문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장님은 의외로 흔쾌하게 촬영하겠다고 했다. 본인은 가볍게 생각한 것 같은데 이제 촬영방법이 문제가 되었다. 해당 방송국에서 요청은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해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사장님 촬영인데 외부영상업체를 불러야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30초 찍는데 무슨 비용까지 들여서 외부업체야? 라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하는 일을 일부러 그렇게 축소할 필요는 없었다. 상당히 정치적으로 문제가 흐르고 있었다.

인사말을 이것저것 짜깁기해서 작성했다. 축하 인사말은 진부하고 틀에 박힐 수 밖에는 없다. 나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작성했다. 하지만 부장님은 좀 더 중후하게 쓰라는 주문을 했다. 사장님이 읽는다는 이유에서 였다. 몇 번의 수정을 거쳐 비록 피상적이긴 하지만 전보다는 중후한 4마디 정도의 문구가 나왔다. 완성된 문구를 읽다보니 영상팀에 프롬프터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비용이 더 추가된다고 했다. 나는 B4용지를 출력해서 누가 들고 있으면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옆에서 다른 의견을 냈다. 사장님 촬영은 우리부서의 실적이니 없어보이는 B4용지보다 있어보이는 프롬프터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답답했지만 옳은 말이었다. 

시황제가 죽고난 뒤 간신이었던 고조는 신하들을 숙청하기 위해서 시험삼아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말이라고 한 신하들은 살아남았지만 눈치없게 사슴이라고 했던 신하들은 어김없이 숙청을 당했다. 직장을 다니면 사슴을 말이라고 해야 할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사실 그 때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조직생활을 하는 지혜이다. 권력자가 말이라는데 굳이 사슴이라고 해서 내가 무엇을 얻겠는가? 사슴을 정말 말이라고 믿을 수 있으면 더 좋다.

그러나 아는대로 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일을 하면서도 끝까지 이 요청은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접을 수 없었고, 찍더라도 적은 비용으로 가볍게 찍었어야 했다. 안해도 되는 일을 하면서 비용을 과도하게 쓰는 것이 설사 나와 우리 부서가 일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 생각을 윗사람에게 전달시킬 수 없는 구조, 다른 의견을 제시조차 할 수 없는 이 구조 자체가 더 큰 문제이다. 

사슴을 말이라고 부르면 잠시 나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권력에 취해 사슴을 말이라고 부르는 지도자와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실제로 말을 보는 광신도로 이뤄진 조직이 살아남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나를 지키기 위해 빨리 그만둬야 겠다.